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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벅찼다, 오늘 우리 이정표 될 독립의 첫 발걸음 앞에서

행복 한 삶 2019. 4. 11. 06:56

가슴 벅찼다, 오늘 우리 이정표 될 독립의 첫 발걸음 앞에서

하얼빈 |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안중근의 도시 하얼빈에 가다]

이토 히로부미 사살한 기차역에 있는 기념관

동상 정면엔 세 발의 총성상징하는 동심원

관람객 역사를 바꾼 것에 경의메시지 남겨

 

<b>일제 감시 속에서도 당당히 장례</b> 1922년 7월8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엄수된 독립운동가 김가진 선생의 장례 행렬 모습(흑백 부분)을 프랑스 조계지였던 현재의 거리 사진 위에 얹혔다. 김가진 선생은 1919년 대동단 총재로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도 독립운동가다. 김가진 선생의 장례식은 이두마차가 앞장서고 긴 만장 행렬이 뒤를 따라가는 대규모였다. 이는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당당히 성대한 장례를 치름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널리 알리려는 뜻으로 분석된다. 상하이 | 이준헌 기자 

일제 감시 속에서도 당당히 장례</b> 192278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엄수된 독립운동가 김가진 선생의 장례 행렬 모습(흑백 부분)을 프랑스 조계지였던 현재의 거리 사진 위에 얹혔다. 김가진 선생은 1919년 대동단 총재로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도 독립운동가다. 김가진 선생의 장례식은 이두마차가 앞장서고 긴 만장 행렬이 뒤를 따라가는 대규모였다. 이는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당당히 성대한 장례를 치름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널리 알리려는 뜻으로 분석된다. 상하이 | 이준헌 기자

 

일제 감시 속에서도 당당히 장례 192278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서 엄수된 독립운동가 김가진 선생의 장례 행렬 모습(흑백 부분)을 프랑스 조계지였던 현재의 거리 사진 위에 얹혔다. 김가진 선생은 1919년 대동단 총재로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도 독립운동가다. 김가진 선생의 장례식은 이두마차가 앞장서고 긴 만장 행렬이 뒤를 따라가는 대규모였다. 이는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당당히 성대한 장례를 치름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널리 알리려는 뜻으로 분석된다. 상하이 | 이준헌 기자

 

백범 김구 바로 뒤의 안공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사진 속 안춘생, 환국 전 마지막 기념사진의 안우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사진을 훑다보면 씨 성을 가진 사람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우연이 아니다. 이들 모두 임시정부 수립 9년 전 순국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일가다.

 

안중근 의사가 11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차역의 현재 모습. 왼편의 작은 문을 통해 최근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갈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11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차역의 현재 모습. 왼편의 작은 문을 통해 최근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갈 수 있다.

 

첫째 아들인 안중근을 잃은 뒤 연해주를 거쳐 상해로 온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남동생 안정근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또 다른 남동생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윤봉길·이봉창 의사가 의거 전 마지막 사진을 남긴 곳이 그의 집이다. 임정과의 인연은 3대째로 이어졌다. 조카 안춘생은 광복군 대원, 안우생은 백범의 비서를 지냈다. 임시정부의 시간은 안중근 일가의 시간과 함께 흘렀다. 이런 개개인의 결단이 모여 임시정부를 움직였다. 임시정부가 1919년 민주공화제를 내세워 출범한 뒤 독립운동 세력 간의 갈등 속에서도 끊임없이 좌우통합을 시도한 밑바탕에는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보통 사람들의 힘이 있었다. 당시 독립운동계에 이정표가 된 안 의사의 의거는 안중근 일가사람들에게 누구보다 아프게 와닿는 지표였다.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그 모든 발걸음의 시작, 안중근의 시간을 좇았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차역에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안 의사 전신상. 동상 위 시계는 1909년 10월26일 거사 시각을 가리킨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차역에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안 의사 전신상. 동상 위 시계는 19091026일 거사 시각을 가리킨다.

 

지난 9안중근의 도시로 기억되는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을 찾았다. 안 의사의 31년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간이 흐른 곳이다. 안 의사는 19091026일 오전 930분 이곳 하얼빈 기차역에서 일본 초대 총리와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을 지낸 침략의 원흉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그달 22일 하얼빈에 도착해 거사계획을 점검하고, 실행 뒤 붙잡혀 뤼순 감옥으로 옮겨가기까지 11일간을 머물렀다.

 

일곱 개의 별과 세 개의 동심원.’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 기차역에서 그날을 돌아보는 키워드다. 지난달 30일 기차역 한쪽에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는 유리창 너머로 거사 장소인 1번 플랫폼이 보인다. 텅 빈 바닥에 일곱개의 별이 박힌 삼각형과 세 개의 동심원을 품은 사각형 표식이 있다. 각각 안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가 당시 서 있던 지점이다. 일곱개의 별은 안 의사의 아명 안응칠에서 따왔다. 몸에 북두칠성 모양의 반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해 태어났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세 개의 동심원은 안 의사가 이토에게 발사한 세 발의 총성을 뜻한다.

 

지난 9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차역에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둘러보는 관람객.

지난 9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기차역에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둘러보는 관람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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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기념관은 공사로 이전했다가 2년 반 만에 다시 원래의 현장으로 옮겨오면서 이 같은 상징을 군데군데 배치했다. 기념관 내부의 전신 동상은 세 개의 동심원을 반원 형태로 표현한 받침 위에 서 있다. 동상의 시선이 향하는 정면에도 같은 형태로 세 발의 총성을 상징하는 세 개의 반원이 겹쳐 있다. 당시 이토에게 세 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등에게 네 발을 쏜 안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됐다.

 

당시 하얼빈 기차역은 러시아의 관할지역이었다.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그가 러시아말로 세 번 반복한 이 외침은 평화와 독립의 염원을 담은 동심원이 돼 국내외로 번져나갔다. 일본당국에 넘겨진 뒤엔 뤼순 감옥으로 옮겨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이토의 15개 죄목을 고발하며 법정 투쟁을 이어갔다. 일제의 허위 재판의 결과는 사형. 1910326일 사형이 집행됐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재현된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당시 발사 지점(왼쪽 사진)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 지점.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재현된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당시 발사 지점(왼쪽 사진)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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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한 벽면에는 백범이 안 의사의 의거 39주년을 기념하며 한 말이 붙어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에 한걸음조차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나의 이 발걸음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전남 화순에서 찾아온 박서임씨(50)현장을 실제로 보니 소름이 끼친다면서 “110년 전 일과 지금의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그 삶이 이어져서 지금 내 삶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말했다.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시관에는 한국과 중국 등 관람객들이 남긴 메시지가 제법 남겨져 있다. “역사를 바꾼 안중근 의사에게 경의를 표합니다”(후청지에), “감사합니다. 그곳에선 가족들과 행복하세요”(권소연). 한 관람객은 안 의사가 남과 북이 힘을 모아 통일된 조국을 이루시게라고 말하는 모습을 그려넣었다.

 

안 의사가 거사 계획을 논의했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자오린공원 내에 서 있는 안 의사의 유묵비.

안 의사가 거사 계획을 논의했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의 자오린공원 내에 서 있는 안 의사의 유묵비.

 

기념관에서 차로 20분쯤 가면 안 의사가 고국이 독립되기 전까지 묻히길 원했던 자오린 공원이 있다. 하얼빈에서 마지막으로 거사 계획을 점검했던 장소다. 공원 한쪽에는 안 의사가 사형 이틀 전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쓴 서예 작품 청초당(靑草塘)’이 왼손 넷째 손가락이 잘린 손도장과 함께 돌에 새겨져 있다. ‘풀이 푸르게 돋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안 의사 유해는 이곳에도, 고국에도 묻히지 못했다. 어머니와 두 형제, 부인의 유해 역시 중국 땅 어딘가에 묻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뿌린 씨앗이 자라 독립을 이뤘지만, 한반도 평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안중근이 꿈꾸던 풀이 푸르게 돋은 언덕까지 우리는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안중근이 남긴 물음은 현재에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