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이사장, 꼿꼿하게 한길을 걸은 여성운동가로 기억할 것”
“이희호 이사장, 꼿꼿하게 한길을 걸은 여성운동가로 기억할 것”
원문보기: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897517.html#csidx7a4d3b84cddce0790e29412cc4fe2ab
축첩반대운동, ‘요정 정치’ 반대 운동, 가족법 개정 등
여성인권·결식아동·입양아 등 약자, 소외계층 위해 한길
지은희·진선미 장관 “큰뜻 이어받아 노력할 것”
11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이사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희호 선생님은 힘들게 여성운동 현장에서 일하신 활동가셔서 여성운동가와 여성운동을 지원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계셨지요. 우리나라 유일의 여성운동 지원 재단인 한국여성재단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셨어요. 물론 박영숙 선생님과의 깊은 동지애 때문이시기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운동지원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영부인이 선택하기는 더 어려운 일이죠!!! 이희호 선생님은 정말 꼿꼿하게 한길 걸은 1세대 여성운동가. 그야말로 ‘대통령 부인’이 아니라 여성운동가로서 역할과 자긍심을 갖고 여성 후배들에게 어떻게 도움될지 고민한 분이셨습니다. 영부인이 되시기 전에도 되신 뒤에도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여성상을 한결같이 강조하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평화통일운동에 관심 갖고 기여하셨습니다. 그 길에 함께하셨던 박영숙 선생님도 이제 계시지 않고 이희호 선생님도 돌아가셔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김금옥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김대중·이희호’라는 부부 공동문패를 따라서 달았던 저는 얼마 전 이희호 선생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진선미 여성부 장관과 함께 찾아 뵈었습니다. 시간을 잘 맞추지 못해 주무시는 모습만 뵙고 왔습니다. 이제 그 모습을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당당하게 투쟁하며 품위를 잃지 않았던 이희호 선생님은 이 땅의 여성들에게 주체적인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신 큰 스승입니다. 스승이 떠나가신 빈 자리가 허전하지 않도록 ‘여성이 여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당부하신 말씀과, 생의 마지막에도 기도하신 이 땅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억하고 행동하겠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안김정애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전 상임대표 “참으로 험난한 한 세기를 살다 가셨네요. 지난한 한반도의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여성으로서 가열차게 살아내신 삶을 잊지 않고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저희 한반도 여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평화공존의 한반도에서 남북여성들이 함께 손잡고 가부장제와 군사주의 없는 세상 만들 수 있도록 힘 주소서.”
이슈이희호 여사 별세
이희호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슈이희호 여사 별세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무기수 김대중, 어떤 고문과 협박에도 신념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도 사랑하는 아내가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아들이 있었다. 군부독재가 시퍼렇게 날서 있던, 감옥보다 더 감옥같은 세상 속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온 남자에겐 가족들이 걱정스럽고 아팠다. 남편이기에, 아버지이기에 어쩔수 없이 감옥까지 따라온 일상적인 걱정들, 그래서 남자는 그 걱정의 마음들을 편지를 통해 세상 속 가족들에게 전하려 한다.
정권의 감시와 핍박은 날로 극심해서, 때론 편지지가 없어 껌 종이에, 연필이 없어 못으로 꾹꾹 자국을 남겨 가며 몰래 전달하던 편지에는 그래서 그의 정치적 신념만이 아니라 가족을 향한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걱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 중학생인 아들이 공부는 잘 하는지, TV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아비는 늘 걱정이었고 그래서 아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과 아들을 향한 충고들을 고스란히 편지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가장을 감옥으로 보내고 남편 없이, 아버지 없이 살아야 했을 가족들에게는 그 편지 몇줄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 만으로도, 그의 부재를 대신할 수 있었으리라.
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가로디는 “사랑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고 했다. 시대의 어둠을 헤쳐나가는 혁명은 바로 사랑에서 시작된다. 비록 가족과 떨어져 옥중에 있지만, 그로 인해 아버지 없이 살아가고, 아버지 없이 공부해야 하는 중학생 아들에게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선물하고 싶은 아비의 마음처럼 말이다.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정지윤 기자

1960년대초 김대중 전 대통령-이희호 여사 가족이 고궁 나들이를 하고 있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나선 김대중 후보와 이희호 여사가 시민들에 둘러싸여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물컵을 건네는 이희호 여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희호 여사가 11일 펴낸 자서전 <동행>의 표지.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 ‘피플’지에 실린 사진으로, 이 여사는 “남편이 이 사진을 증거로 평소 가사를 많이 도왔다고 주장하곤 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희호 여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8년 김 대통령 취임 이후 ‘퍼스트레이디’로서도 역대 어느 ‘영부인’들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면모를 선보였다.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경향신문 이기수 편집국장(왼쪽)이 이희호 여사에게 지난 2010년 이 여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선물하고 있다.가운데는 유시춘 작가.정지윤기자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 거실에 김 전 대통령의 생전 사진이 놓여 있다. 정지윤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며 “여사님은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 하실 정도로 늘 시민 편이셨고,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