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아르헨티나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르헨티나 상원이 임신중지(낙태)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아르헨티나 대사관 앞에서
낙태 합법 법안 통과 촉구
“낙태죄 폐지 세계적 흐름”
전 세계 응원 집회 확산
“아보르토 레갈 야(Aborto Legal Ya·지금 당장 임신중지를 합법화하라).”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아르헨티나 대사관 앞. 초록색 스카프를 목에 두른 남녀 20여명이 익숙지 않은 발음으로 스페인어 구호를 외쳤다. 손에는 ‘아르헨티나 임신중지 합법화를 지지합니다’라고 적힌 녹색 현수막과 팻말이 들렸다. 구호가 시원하게 나오지 않자 사회자가 웃으며 말했다. “종이에 적힌 알파벳 스펠링 그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구호가 두어 번 더 돌고 나서야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이들은 여성·시민단체가 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회원들이다. 공동행동 측은 “낙태죄 폐지는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다. 오늘이 아르헨티나의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이 통과되는 역사적인 날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회견에서 “아르헨티나는 임신중지 합법화는 물론,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구체적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여성들은 다양한 조건과 맥락에서 삶을 살아가고 선택하는 존재이고, 이런 여성들의 권리와 사회적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말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임신중지 합법화를 주장하는 여성들이 7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의회 앞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상원이 임신 14주까지 낙태시술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 AP연합뉴스
앞서 아르헨티나 하원은 지난 6월 임신 14주까지는 임신중지(낙태)가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낙태가 법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안전하지 않은 낙태시술을 받다가 숨지는 여성들이 끊이지 않자 10년 전부터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법 개정을 촉구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그들이 착용한 녹색 스카프는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의 상징이 됐다. 아르헨티나 상원은 이날 오전 10시(현지시간) 법안 토론을 벌인 뒤 표결에 나선다.
공동행동 측은 “아르헨티나는 한국과 유사하게 임신중지가 엄격하게 금지돼 왔다. 아르헨티나의 승리는 우리 모두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들은 ‘여성은 애 낳는 기계가 아니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아보르토 레갈 야’, ‘어보션 라이트 나우(Abortion right now)’ 등 3개 언어로 구호를 외쳤다.
미국과 브라질, 아일랜드 등 북미, 유럽, 중남미의 아르헨티나 대사관이나 거리에서 아르헨티나 임신중지 합법화를 응원하는 연대 시위나 퍼포먼스가 열렸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지난 5일 임신중지 합법화에 찬성하는 여성들이 붉은 망토를 두른 시녀 복장에 녹색 손수건을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시녀 복장은 가부장적 권력에 억압받는 여성을 상징한다.

세계 여러 여성단체와 누리꾼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응원 메시지와 임신중지 합법화 촉구 글을 올렸다.
세계 누리꾼들은 SNS에서 아르헨티나 상원의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해시태그 운동을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을 응원하면서 #AbortoLegalYa. #QueSealey(법을 제정하라), #8A(8월8일) 등 해시태그를 붙이는 식이다. 한국의 누리꾼도 “아르헨티나, 한국 둘 다 파이팅” “여성에게 자유와 권리를” 같은 글을 올렸다.
비정부기구인 국제앰네스티도 해시태그 운동에 동참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관계자는 “안전한 낙태를 받는 것은 인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적 자율권을 자유롭게 행사하고, 임신 여부와 시기 등 자신의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결정을 직접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영 위원장은 기자회견 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 하원에서 지난 6월 임신중단 합법화를 결정했을 때 한국 활동가들도 함께 관련 동영상을 돌려보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여성들이 10년 넘게 힘들게 싸워온 것을 잘 알고 있는 데다, 임신중단이 불법인 현재 한국 상황과 겹치다 보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했을 때 순간과 거의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앞서 공동행동은 서울 헌재 앞에서 ‘낙태죄 위헌 미루지 마라’라고 쓴 현수막을 펼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최근 헌재가 낙태를 범죄로 보는 형법 269조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등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재판관 5명이 바뀌기 전 마지막 선고기일인 이달 말 선고하지 않기로 한 결정(경향신문 8월6일자 1면 보도)을 비판한 것이다.
이들은 “낙태죄는 위헌이다. 당장 낙태죄를 위헌 판결하라”며 구호를 외치다가 헌재 직원들과 마찰을 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