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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빈자리 그래도, 동녘에 해는 아름답게 떠오른다.

행복 한 삶 2019. 1. 26. 10:20





그래도, 동녘에 해는 아름답게 떠오른다.

예쁘게 다가오는 가을의 추억으로 삶에 시름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잠시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시고 멋진 추억 귀하게 간직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 잠시라도 만들어 보면서 무엇이 그리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 꼭 집어 대답 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만...!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힘겨운 오늘이 지나고 새롭게 맞이할 내일은 간절한 마음으로 행복을 꼬~옥 움켜쥐고 싶다고, 염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그리 말했다 합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고 웃어서 행복해질 수 있다 하는 그 말에 업혀서 행복한 가을을 염원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로 행복한 가을날 燈火可親(등화가친)의 계절, 영혼을 살찌우는 참 좋은 양식인 독서의 계절, 풍요로운 삶이되시길 소망하면서 몸과 마음, 영혼을 살찌워 맑고, 건강함속에서 나 그대에게 행복의 열매를 드릴 순 없어도 그대 삶에 행복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청아한 가을에 찬란한 오색 빛 수 놓을 기쁨으로 다가서는 벗이길 바라겠습니다.

여기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눈물겹도록 진한 감동을”주는 사연에 소중한 글, 앞전에도 올린 적 있었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생각고저 다시 한 번 올립니다.

한 남자를 사랑했기에 피를 나눈 형제들 뒤로하고 부모님 곁을 떠나올 때 호적까지 파들고 한 남자를 택해 시집와 시댁과 남편 자녀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조강지처를 살갑게 보듬고 온갖 정성을 다해 섬기듯이 사랑해야겠습니다. 梁南石印

아내의 빈자리...!

人命在天(인명재천)이라 했다지 않았던가...! 아무런 준비도, 예고도 없이 운명의 종말이 찾아올 줄이야. 행복하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은 일순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몸부림치던 그 비극의 날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우리 가족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고향을 향했다.

아내와 두 딸은 오랜만의 고향 나들이라
그저 즐겁고 행복해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서 대전 부근의 호남 고속도로를 지날 때였다.

2차선으로 달리던 승용차가
갑자기 차선을 변경하FONT-SIZE: 14pt; FONT-FAMILY: 바탕체; mso-ascii-font-family: 바탕체; mso-hansi-font-family: 바탕체">나는 그 차를 피하려고 순간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 차체가 왼쪽으로 틀리면서 중앙분리대 화단을 넘어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던 승용차와 정면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의식이 돌아와 깨어났을 때,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부서져 있었고 아내와 큰 딸은 의식이 없었다. 그날 밤 아내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사람들은 이럴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고 했나보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으면서
얘기를 했던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미친 것이 아니라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동료들은 나를 위로하며 현실을 인정하라고 설득하였다.
나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나 혼자 살아있다는 것이 더 큰 괴로움이었다.

3일 후 아내는 묘지로 옮겨졌다.

나는 구급차에 실린 채 아내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10여 년 간의 우리의 사랑, 그래 아직도 못 다한
우리의 사랑을 접어두고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반 평의 무덤에 아내를 묻으며 나는 울부짖었다.
“두 딸 훌륭하게 키우겠소.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오.”

이렇게 쉽게 갈 것을 그렇게 잘 살아 보려고 애쓰며
힘들게 달려왔단 말인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 하더니 정말 빈손으로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복받치는 설움을 삼키며 사랑하는 내 아내를
가슴속에 영원히 묻어야 하는 운명을 한탄했다.

다행히 큰 딸은 장 파열 수술을 받고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나는 대전 국군병원에 입원하여 골절수술을 받았다.

긴 시간이 지나고 우리 세 식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애들 엄마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다.

다시 만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 셋은 끌어안고 울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해버린 딸들이
오히려 아빠를 위로하였다.

그것이 서러워서 난 또 울었다.
다음 날, 국화꽃을 엄마의 묘소에 꽂으며
애써 울음을 참는 딸들에게 말했다.
“엄마는 착한 일을 많이 하셔서 하나님이 옆에 두려고 일찍 불러 가신거야.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보고 있으니까

선미, 선경이 착하게 자라야 해.”
텅 빈 집안은 더없이 쓸쓸하고 허전하였다.

구석구석 배어있는 아내의 손길이 애처로워 이 구석 저 구석에 머리를 묻고 눈시울을 적시었다.


나는 옷가지를 정리하고 밀린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통장이 몇 개인지 애들 옷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든 것에 서툴렀다.

평소"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FONT-FAMILY: 바탕체; mso-ascii-font-family: 바탕체; mso-hansi-font-family: 바탕체">무관심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좀 더 아내를 도와주고 사랑해줄 걸.'
서랍을 정리하다 그만 또 울어버리고 말았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받았던 봉급명세표를
아내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보관해 둔 것이다.


적은 군인 봉급이었지만
소중히 여기고 아끼면서
살았던 착한 아내가 가여웠다.


소록소록 흰 눈이 쌓이는 밤, 부엉이도 서럽게 울어대던 밤에 나는 내 곁을 떠나간 아내의 생각이 간절해서 텅 빈 옆자리를 더듬으며 잠 못 들고 뒤척였다.

그때마다 쌔근쌔근 잠든 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시장에 간 어머니가 보고 싶고 걱정이 되어 동구 밖에 나가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 때 나는 하룻밤도 엄마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었다.
하물며 엄마가 영영 떠나 가버린
내 아이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짐했다.
“이제는 엄마 몫까지 해야 한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제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갈구했던 시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줄기 바람처럼 스쳐가는 우리의 인생,
이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남은 세월을 욕심 부리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주면서, 주어진
내 운명에 순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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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의 딸 사랑

그녀의 집에 처음 인사 가던 날, 나는 그녀의 어머니께 드릴 커다란 꽃바구니를 준비해 집 근처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뒤 나타난 그녀는 한참 말없이 앉아 있더니
조심스럽게 자기 아버지가 하반신 불구라
앉아 지내는 장애인이라고 했다.

순간 당황한 내가 아무 말도 못하자,
그녀는 집에 돌아가 다시 잘 생각해 보라며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불현듯 그녀가 내 곁에서
영원히 떠나 버릴 것 같은 두려운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대학에 들어간 나는
공부는커녕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구속과 제적,
복학을 반복하다 어느새 서른이 되었다.

이듬해 봄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취업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나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전화했다.

“나야, 말도 안 들어 보고 그렇게 가면 어떡하니? 빨리 와.” 잠시 뒤 다시 나타난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겸연쩍게 웃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불편한 몸으로 작은 금은방에서 세공 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온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일찍 시집가 버린 언니, 어린 동생. 그녀는 집안 사정 때문에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하고 십여 년 동안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었던 것이다.

나는 한때 크고 거친 그녀의 손이 불만이었지만
사정을 알고 나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녀의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고 보니
그녀는 아버지를 너무나 쏙 빼닮았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말씀 드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을 승낙하셨지만
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새해를 맞아 그녀와 같이 속리산에
여행 갔다가 막차 시간을 넘겨 버렸을 때였다.
나는 울먹이는 그녀를 달래며 집으로 전화를 했다.

마침 아버님이 받으셨는데 대뜸 '이 XX의 ○○야! 그러면 미리 전화라도 해줘야지!' 하면서 벌컥 화를 내고는 전화를 탁 끊어 버리셨다.

그렇게 험한 말씀을 하시다니…
그녀에겐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내심 한동안 불쾌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집에도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녀의 아버지가 몸이 좀 불편하시지만 아버지께서는 드디어 술 한 잔 나눌 수 있는 사돈이 생겼다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 해 가을 우리는 드디어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함께 입장하기를 바랐지만, 장인어른이 한사코 싫다고 하셔서 둘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입장했다.

그리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나는 제주도로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평생 나들이 한 번 하지 못한 아버지가 가슴에 맺혀 비행기 타기가 그렇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중에 같이 조금 더 모아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제주도를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평생 한 번뿐인 신혼여행인데 또 아버지 타령이냐고 옹졸하게도 짜증을 냈다.

그런데 결혼 뒤 얼마 안 되어 밤늦게
처갓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

평소 심장병에 당뇨 증세가 있던 장인어른이 응급실에
입원하셨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병세가 안 좋아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아내와 나는 거의 한 달 내내 병실을 지켰다.

변두리에 있던 신혼집과 시내에 있는 병원을
오가는 일은 사람을 많이 지치게 했다.

게다가 날로 불어나는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장인어른을 뵐 때마다 울기만 하는 아내 앞에서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장인어른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던 어느 날이었다.

혼자 병실에 있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힘없는 손으로
내 두 손을 꼭 잡으셨다.

“난 처음에 자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몸도 깡마르고 직업도 없고. 내가 우리 딸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어려서부터 너무 고생만 시켜서 넉넉한 집안에 시집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랐었는데…

지금 보니 자네만한 사람이 없군. 내가 잘 해주지 못하고 가지만 자네가 우리 딸 꼭 좀 행복하게 해주게.”“왜 그런 말씀하세요. 얼른 나아서 저희와 같이 제주도에 가셔야죠.”

내 손을 잡은 장인어른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아내가 얼굴뿐 아니라 손까지 아버지를 꼭 빼닮은 사실을 알았다.

그날 저녁, 장인어른의 상태가 갑자기 위급해졌다.
얼마나 힘든지 장인어른은 숨을 가쁘게 쉬다가 가족들에게
변변한 유언 한 마디 못 하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좋은 세상에 가서 다리 쭉 펴고 실컷 뛰어다니라는 장모님과

아내의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도 한없이 아팠다.

요즘도 가끔 피곤에 지쳐 잠든 아내의 손을
슬며시 잡을 때면 문득 장인어른이 생각난다.

그리고 사위의 손을 꼬옥 잡고
당부하시던
그날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긴다.

아직도 장인어른은 아내의 모습 속에 남아 있다.
외할아버지 얘기를 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