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57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만든 ‘정치개혁공동행동' 전국 대표자들이 지난 1월14일 오전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월 안에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제도 개혁 방안을 합의 처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그래야 한다’는 의미의 당위론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게임의 룰은 선수가 아니라 게임 협회나 심판이 정해야 합니다. 선수가 정해야 하는 경우라면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선수가 합의해서 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라는 의미의 현실론으로는 틀린 말입니다. 우리나라 선거법은 공정하게 만들어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로 독재 정권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법을 일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법의 ‘흑역사’를 한 번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선거법 논란의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전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미군정 당국의 군정법령에 의해 실시됐습니다.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국민의 대표를 뽑은 것입니다. 임기 2년의 국회의원 200명을 소선거구제로 선출했습니다. 선거인 명부는 선거인의 자진등록에 의하여 작성하는 자진신고 등록제였으며, 21세 이상 국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0년 5월 10일 치러졌습니다. 제헌 국회가 제정한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210명을 소선거구제로 뽑았습니다. 헌법이 국회의원 임기를 4년으로 정했기 때문에, 2대 국회부터 임기는 4년으로 늘어났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이른바 ‘발췌 개헌’을 했습니다. 개정 헌법은 민의원과 참의원을 각각 선출하는 양원제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1954년과 1958년 국회의원 선거는 전쟁 이후 혼란,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민의원 선거만 치렀습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헌법이 내각책임제로 개정되고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1960년 7월 처음으로 양원제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233명의 민의원, 58명의 참의원을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군인들은 국회를 해산시키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최고 권력기관을 설치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 3공화국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로 확정했습니다. 권력구조는 대통령제로, 국회는 단원제로 환원시켰습니다. 국회의원 수는 150명 이상 200명 이하로 묶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1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했습니다. 처음으로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법 제안 이유는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이유를 “지연·혈연의 폐를 방지하기 위하여 소선거구에 다수대표제와 전국선거구에 비례대표제를 병용”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1963년 11월 치러진 6대 국회의원 선거는 지역구 131명, 전국구 44명으로 모두 175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국무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신하도록 했습니다. 비상국무회의가 유신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임기 6년의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종신 집권이 가능하도록 한 것입니다. 국회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일괄 추천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유신정우회 의원으로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비상국무회의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만들었습니다. 지역구 선거는 하나의 지역구에서 2명씩 뽑는 중선거구제를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이에 따라 1973년 2월 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46명의 지역구 의원(임기 6년)과 73명의 유신정우회 의원(임기 3년)이 선출됐습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했습니다.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10월 개헌을 했습니다. 7년 단임 대통령을 선거인단이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1981년 1월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중선거구제와 전국구 제도를 병행하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선거법에 따라 1981년 3월 1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하나의 선거구에서 두 명씩 뽑는 중선거구제로 지역구 의원 184명을 선출했습니다. 전국구 의원은 92명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법은 이처럼 쿠데타 세력이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헌법을 새로 만든 뒤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제정한 참담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게임의 룰인 선거제도는 여야의 합의에 따라서 만들어야 한다’는 자유한국당과 이른바 보수 언론의 주장은 당위론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서는 거의 존재한 적이 없다는 얘깁니다.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국회의원 선거제도에 대해 여야 합의가 이뤄진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6공화국 헌법이 만들어지고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1988년 4월 26일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노 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국회의원 선거법을 둘러싼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사람의 회고록과 자서전을 찾아보았습니다. 특히 중선거구제였던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갑자기 바뀐 배경이 궁금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 부분을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13대 국회의원 선거는 개정 법률에 의해 소선거구제로 실시하게 되었다”고 딱 한 줄이 나옵니다. 민정당 참패로 이어진 소선거구제를 자신이 도입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당시 사정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부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청와대 사진기자단
“1988년 2월 8일 오전 9시, 나는 전격적으로 총재직 사퇴를 선언했다. 야권통합을 위한 또 한 번의 결단이었다. 불과 한 달 전에 전당대회가 안겨 준 재신임을 다시 내놓으면서 나는 야권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2월 21일 민주당이 야권통합 협상 기구 대표들이 나를 찾아와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나는 나의 총재직 사퇴에도 불구하고 통합 협상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보고, 통합의 진전을 위해 23일 오전 마포 가든호텔에서 김대중을 만나 그의 주장인 소선거구제를 수용해 주었다.”
“당시 나의 소선거구제 수용은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또다시 총재직 사퇴 대신 통합야당의 양 김 공동대표제를 요구, 통합 협상은 금방 벽에 부딪혔다. 김대중은 자신의 주장에 나를 끌어들여 총재직에 연연한다는 비판을 나와 나누어 가지려 했다. 나는 평민당과의 통합 협상을 포기했다.”
“나 또한 야권통합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통합을 위해 민정당과 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중선거구제의 철회를 요구했다. 야권통합의 의미는 원내 제1당이 되는 데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선거구제로는 어림도 없었다. 소선거구제로 정면 승부를 펼쳐야 가능했다.
나는 본래부터 소선거구제를 지지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들은 거의가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양당제를 정착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고, 당시 여론조사를 하면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소선거구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민주당에 중선거구제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김영삼 씨가 조종하는 민주당은 이를 거부했다.”
“김영삼 씨는 여당에 승리하는 것보다 평민당을 해체하는 데 몰두했다. 민정당까지 야당이 합의하면 선거법 개정안을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민주당은 유신 시대의 유물인 중선거구제에 집착했다.”
“민주당은 여전히 중선거구제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낙선이 두려워 동반 당선을 바라는 상당수의 후보자를 제어하지 못했다. 이러자 보다 못한 민정당이 국민의 뜻이라며 소선거구제를 들고 나왔다. 민심을 판독하고 민의를 선점하려는 포석이었다. 3월 8일 소선거구제를 골격으로 한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1989년 1월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연합뉴스
“여러분들이 공명선거를 해야겠다고 하는 의지만 조금이라도 있었다고 하면 이 선거법은 얼마든지 타협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미 민정당, 민주당, 평민당은 소선거구제를 합의하고 다 같이 소선거구제를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주권이 바로 행사될 수 있도록 공명선거를 보장하자는 제도적 개선이었습니다.”
“국회의장은 오늘 이 자리에서 아침에 있었던 이 불행한 사태를 말끔히 씻고 새롭게 대화를 통한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법을 만들도록 조치해 주어야 되는 것과 동시에 국회의장은 오늘의 이 사태에 대해서 국민 앞에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지난 2일 오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선거제도개혁 패스트트랙 이후 전망과 과제' 세미나에서 민주평화당 정동영 대표(오른쪽 두번째)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