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좋은글┓

[경향의 눈]우리는 김원봉을 얼마나 알고 있나

행복 한 삶 2019. 6. 13. 08:34

 

 

 

 

 

 

 

 

[경향의 눈]우리는 김원봉을 얼마나 알고 있나

서의동 논설위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122044015&code=990503&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row1_3&C#csidx879b636a6584933b3d651317982ec4e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독일제국에 합병된 상태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연합국의 분할통치를 받게 됐다. 38선 남북을 미·소가 분할 점령했던 한반도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연합국의 군사정부와 오스트리아 임시정부가 공존했다는 점이 달랐다. 패전 직전 노(老)정객 카를 레너가 친나치 계열을 뺀 모든 정파를 아우른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다.

[경향의 눈]우리는 김원봉을 얼마나 알고 있나

소련을 제외한 3개 연합국은 사회주의 정치가 레너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를 경계했으나 얼마 안 가 승인했고, 임시정부는 오스트리아 전역에 관할권을 행사하게 됐다. 그해 11월 총선에서 50%를 득표해 제1당이 된 보수계 국민당은 단독정부 수립 대신 사회당, 공산당과 ‘대연정’을 구성했다. 분단 위기를 딛고 통일독립을 이루려면 정치권이 기득권을 버리고 단합해야 한다는 시국인식이 좌우합작을 가능케 했다.

 

국민당은 사회주의 정책인 국유화를 수용했고, 사회당도 미국이 주도하는 마셜플랜 참여에 찬성하는 등 정치권은 실사구시의 태도로 국난을 타개해 나갔다. 1955년 주권을 회복하기 전까지의 10년간 오스트리아 정치권의 이념을 넘어선 결속과 협력은 지금 봐도 감탄스럽다. 해방 후 극심한 분열로 날을 지새우다 분단과 전쟁으로 치달았던 한반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계기로 약산 김원봉이 다시 논란의 핵으로 떠올랐지만 문 대통령이 말하려던 것은 ‘김원봉의 복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같은 ‘좌우합작’이었을 것이다.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중략) 광복군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 기득권이나 사익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마음이 애국”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말이라면 무조건 물어뜯고 보는 자유한국당과 보수세력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없으니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 만들려다 폐기된 국정교과서의 고교 한국사에 문 대통령의 추념사와 거의 같은 기술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오마이뉴스 6월7일 보도).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로 결집한 것처럼 중국 관내의 무장세력도 한국광복군으로 결집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한 데 이어, 조선의용대 본부 병력이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김원봉은 부사령에 임명되었다.” 필진이 보수학자들 일색이던 국정교과서조차 김원봉의 ‘좌우합작’을 평가한 것이다. 1920~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에서 가장 혁혁한 업적을 세운 김원봉이 자신의 기반인 조선의용대를 해체하고 광복군에 합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원봉은 대의를 위해 기득권을 내려놨다.

 

귀국한 뒤 김원봉은 좌익계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는 한편 중도세력의 좌우합작 운동을 지원하다 월북했다.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 데 이어 여운형의 피살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월북 뒤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것은 알려진 대로이지만, 납북·월북된 중도파 정치인들과 함께 ‘중립화 평화 통일방안’을 내놓는 등 조선노동당과 다른 노선을 걸으려 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지만 해방 후 정치가들이 오스트리아처럼 좌우합작을 이뤘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좌우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정치인, 기득권 대신 통합을 선택한 정치인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미·소와 협상을 벌여나갔더라면 적어도 수백만이 희생되는 전쟁의 참화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사회가 굳이 71년 전 남한 땅을 등진 김원봉을 기억하고 불러내려는 것은, 그의 항일투쟁 때문만이 아니라 통합의 대의를 위해 기득권을 버릴 줄 아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김원봉은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를 좋아했고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두루 심취했다. 편협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독립에 필요하다면 누구와도 손잡는 실사구시형 전략가였다. “의열단원은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 입었다.”(님 웨일스·김산 <아리랑>)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만주, 상하이, 일본을 종횡무진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공포에 몰아넣은 ‘어벤저스’이면서도 자신의 삶과 일상에 충실한 멋진 청년들이었다. 김원봉을 편협한 이념의 틀에 가둬선 그를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img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슈이희호 여사 별세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무기수 김대중, 어떤 고문과 협박에도 신념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도 사랑하는 아내가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아들이 있었다. 군부독재가 시퍼렇게 날서 있던, 감옥보다 더 감옥같은 세상 속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온 남자에겐 가족들이 걱정스럽고 아팠다. 남편이기에, 아버지이기에 어쩔수 없이 감옥까지 따라온 일상적인 걱정들, 그래서 남자는 그 걱정의 마음들을 편지를 통해 세상 속 가족들에게 전하려 한다.

정권의 감시와 핍박은 날로 극심해서, 때론 편지지가 없어 껌 종이에, 연필이 없어 못으로 꾹꾹 자국을 남겨 가며 몰래 전달하던 편지에는 그래서 그의 정치적 신념만이 아니라 가족을 향한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걱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 중학생인 아들이 공부는 잘 하는지, TV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아비는 늘 걱정이었고 그래서 아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과 아들을 향한 충고들을 고스란히 편지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가장을 감옥으로 보내고 남편 없이, 아버지 없이 살아야 했을 가족들에게는 그 편지 몇줄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 만으로도, 그의 부재를 대신할 수 있었으리라.

 

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가로디는 “사랑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고 했다. 시대의 어둠을 헤쳐나가는 혁명은 바로 사랑에서 시작된다. 비록 가족과 떨어져 옥중에 있지만, 그로 인해 아버지 없이 살아가고, 아버지 없이 공부해야 하는 중학생 아들에게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선물하고 싶은 아비의 마음처럼 말이다.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정지윤 기자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정지윤 기자

 

1960년대초 김대중 전 대통령-이희호 여사 가족이 고궁 나들이를 하고 있다.

1960년대초 김대중 전 대통령-이희호 여사 가족이 고궁 나들이를 하고 있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나선 김대중 후보와 이희호 여사가 시민들에 둘러싸여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나선 김대중 후보와 이희호 여사가 시민들에 둘러싸여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물컵을 건네는 이희호 여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물컵을 건네는 이희호 여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희호 여사가 11일 펴낸 자서전 <동행>의 표지.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 ‘피플’지에 실린 사진으로, 이 여사는 “남편이 이 사진을 증거로 평소 가사를 많이 도왔다고 주장하곤 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희호 여사가 11일 펴낸 자서전 <동행>의 표지.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 ‘피플’지에 실린 사진으로, 이 여사는 “남편이 이 사진을 증거로 평소 가사를 많이 도왔다고 주장하곤 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희호 여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1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희호 여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8년 김 대통령 취임 이후 ‘퍼스트레이디’로서도 역대 어느 ‘영부인’들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면모를 선보였다.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경향신문 이기수 편집국장(왼쪽)이 이희호 여사에게 지난 2010년 이 여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선물하고 있다.가운데는 유시춘 작가.정지윤기자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경향신문 이기수 편집국장(왼쪽)이 이희호 여사에게 지난 2010년 이 여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선물하고 있다.가운데는 유시춘 작가.정지윤기자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 거실에 김 전 대통령의 생전 사진이 놓여 있다. 정지윤기자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 거실에 김 전 대통령의 생전 사진이 놓여 있다. 정지윤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며 “여사님은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 하실 정도로 늘 시민 편이셨고,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