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8월 서울가든호텔에서 열린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전국대회에서 실행위원이었던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제공
10일 밤 별세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1세대 여성 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로 꼽힌다. 운동가로 주로 활동한 시기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여서, 그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 다소 생소한 인물이다.
2015년 이화여대를 졸업했다는 회사원 박선영(28)씨는 “사실 우리 나잇대 친구들에게 이희호 여사는 그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학교의 훌륭한 선배로만 아는 인물”이라며 “하지만 이번에 별세 소식을 접한 뒤 여성 인권이 존중받지 못했던 시대에 여성운동에 앞장선 구체적인 내용을 접하고 새삼 ‘페미니스트 이희호’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됐다. 빈소에 조문을 가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민아무개(25)씨는 “이희호 여사님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거 말고는 아는 게 없었는데, 티브이를 보다가 속보가 떠서 별세 소식을 알게 됐다”며 “함께 소식을 접한 여자친구가 자서전을 읽었다며 ‘안타깝다’고 하고, 별세 이틀째인 오늘까지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 올라와 있는 걸 보고 제가 아는 것보다 더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김아무개(25)씨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바로 서는 데 큰 기여를 하신 분인데, 그런 분이 세상을 떠나셔서 가슴이 아프다”며 “이희호 여사는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대통령 부인이다. 영부인은 많았지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인물은 이희호 여사가 처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활동가 김창용(26)씨는 “이희호 여사에 대해 잘 몰랐는데, 시민운동 단체에 들어와 ‘운동하는 사람들은 현안 대응 외에도 문제 발굴을 해내고 불편함을 느끼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이 여사에 대해 알게 됐다”며 “혼인신고 운동 등으로 여성들이 겪은 일상적인 불편함을 발굴해내고 이를 운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여사가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이 이사장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여사’로 가두지 말고, 민주화 운동가이자 여성 운동가이며 사회 운동가인 동시에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 초창기 정치사의 산증인으로 추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트위터 아이디 @eun_****는 “이희호 여사는 1922년생. 박정희보다 5살 적고 김종필보다는 4살, 김영삼보다는 5살 위.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 초창기 정치사의 산증인이자 버팀목께서 떠나셨다”고 했다. @C_F_diab*****는 “여성 운동가 이희호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분의 삶을 ‘여사’로 가두어서는 안 될 겁니다. 기록하고 기억하며 행동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아이디 @miesta*****도 “민주화 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이희호님이라고 따로 호칭했으면 한다. 김대중도 이희호님이 ‘여사’로 남게 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이디 @sun****는 “1998년쯤이었나. 영부인이신 이희호 여사님을 여성의 날 행사 때 뵌 적이 있다. 영부인이 여성의 날 행사에 직접 오시다니, 낯설지만 여사님의 행보에 관심이 갔다. 그분께서 살아오신 시간에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명복을 빕니다”라고 했고, @widerst******는 “이희호 선생님께서 별세하셨군요. 여성 운동가였고, 평화의 사도였고, 한반도 현대사의 영원한 동반자였던 분. 큰 어른의 가시는 길이 부디 따뜻하길 바랍니다”고 썼다. 아이디 @onthetim******는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란 말을 한 번 더 새기며. 이 말이 또한 이희호 선생님의 말이기도 함을 새로이 새기며. 조금이라도 더 충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라고 했다.이주빈 김민제 오연서 기자 yes@hani.co.kr
이희호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무기수 김대중, 어떤 고문과 협박에도 신념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도 사랑하는 아내가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아들이 있었다. 군부독재가 시퍼렇게 날서 있던, 감옥보다 더 감옥같은 세상 속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온 남자에겐 가족들이 걱정스럽고 아팠다. 남편이기에, 아버지이기에 어쩔수 없이 감옥까지 따라온 일상적인 걱정들, 그래서 남자는 그 걱정의 마음들을 편지를 통해 세상 속 가족들에게 전하려 한다.
정권의 감시와 핍박은 날로 극심해서, 때론 편지지가 없어 껌 종이에, 연필이 없어 못으로 꾹꾹 자국을 남겨 가며 몰래 전달하던 편지에는 그래서 그의 정치적 신념만이 아니라 가족을 향한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걱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 중학생인 아들이 공부는 잘 하는지, TV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아비는 늘 걱정이었고 그래서 아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과 아들을 향한 충고들을 고스란히 편지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가장을 감옥으로 보내고 남편 없이, 아버지 없이 살아야 했을 가족들에게는 그 편지 몇줄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 만으로도, 그의 부재를 대신할 수 있었으리라.
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가로디는 “사랑이 없이는 혁명도 없다”고 했다. 시대의 어둠을 헤쳐나가는 혁명은 바로 사랑에서 시작된다. 비록 가족과 떨어져 옥중에 있지만, 그로 인해 아버지 없이 살아가고, 아버지 없이 공부해야 하는 중학생 아들에게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선물하고 싶은 아비의 마음처럼 말이다.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가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정지윤 기자
1960년대초 김대중 전 대통령-이희호 여사 가족이 고궁 나들이를 하고 있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로 나선 김대중 후보와 이희호 여사가 시민들에 둘러싸여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물컵을 건네는 이희호 여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희호 여사가 11일 펴낸 자서전 <동행>의 표지.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 ‘피플’지에 실린 사진으로, 이 여사는 “남편이 이 사진을 증거로 평소 가사를 많이 도왔다고 주장하곤 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5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희호 여사.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8년 김 대통령 취임 이후 ‘퍼스트레이디’로서도 역대 어느 ‘영부인’들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면모를 선보였다.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에서 경향신문 이기수 편집국장(왼쪽)이 이희호 여사에게 지난 2010년 이 여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선물하고 있다.가운데는 유시춘 작가.정지윤기자
지난해 3월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 거실에 김 전 대통령의 생전 사진이 놓여 있다. 정지윤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며 “여사님은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 하실 정도로 늘 시민 편이셨고,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