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역사서 출간 네이비 지식에 올라온 글
환단고기 역사서 출간되었다고 얼핏들었는데..
환단고기 역사 콘서트 날짜가 언제인가요?
ㅠㅠ 얼핏들었는데 잘모르겠네요.
我一退 彼一進
아일퇴 피일진
“우리는 날마다 물러서고, 저들은 날마다 달려든다.”
- 울릉도에서 있었던 일본인들의 만행을 조정에 보고한 대한제국 보고서 내용 중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에서부터, 고구려, 대진에 이르는 우리 역사를 모두 자국의 역사로 집어 삼키고, 일본은 동해를 '일본해'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세계에 공표하기위해 매해 수십억의 예산을 책정해 추진해 왔다. 반면, 우리 정부의 2011년 독도홍보관련 예산은 1,134만원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일왕의 특명으로 만든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어로 정리된 조선의 역사서’를 만들어 한민족사의 뿌리를 도려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함께한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해방 후 대한민국 역사학계를 독점하며 식민사관을 답습해왔다.
최근 경기도 교육청은 학생들의 교육 자료로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를 발간하였다. 이 책에 실린 '단군은 역사적 사실'이란 내용을 동북아역사재단은'고조선 개국 신화는 여전히 신화의 범주에 속하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국민혈세로 동북공정 대응하라고 만들었더니 동북공정에 장단맞추는 이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단체인가?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유일한 정사는 삼국사기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민족의 시작을 삼국시대로, 삼국중 하나인 고구려를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던’ 나라로 정의하고 ‘중국의 국경을 침범하여 중국을 한민족의 원수로 만든 적대국’으로 표현하였다. 신라 법흥왕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을 “구석의 작은 나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속(臣屬)한 자라면 사사로이 연호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 법흥왕이 멋대로 연호를 지어 부른 것은 잘못이었다”고 평가하는 인물이다. 또한, 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던 대진(발해)의 역사는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아니더라도, 이미 1800여 년전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역사교과서에는 단군이 없다.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고조선사를 기록하여 신화 속 이야기로 치부해버렸다,
1908세를 살다가 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 이름도 치세기록도 없는 단 한 명의 단군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로 묘사되어있다.
그러나, 해모수는 주몽의 아버지가 아니라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의 시조로서 주몽의 4대조 할아버지다. 한 무제가 북부여 5세 단군인 동명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기 위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의도적으로 180년의 북부여사를 누락시켰고, 이후 고려와 조선의 사가들은 이것을 그대로 복제해 부여사를 누락하고, 동명왕 고두막한을 고주몽으로, 고주몽의 아버지를 해모수로 바꿔치기 해놓았다.
그리고 한무제가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를 한반도 내부에 설치했다고 지금도 국사교과서에서 ,대학교재로,학술논문으로 가르치고 있다.
식민사관이 무엇인가? 한사군이라는 중국 식민지로 역사를 시작하고 임나일본부를 거쳐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다. 아직도 이 식민사관의 망령은 국사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주류사학의 글 속에 버젓이 우리를 발목잡고 있는 참담한 현실이다.
“우리는.. 역사를 잃어버린 불쌍한 민족이다.”
마음속으로 열 번만 외쳐보라.
“우리 한민족은 역사를 잃어버린 불쌍한 민족이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무식하고 못 배워서가 아니다.
위만에 의해 (옛) 조선이 찬탈된 상고시대이래,
이 땅의 역사는 가진 놈들, 배운 놈들의 배를 더 불리기 위해, 그들의 정신을 더 숭고히 하기위해
시대를 타고 권력에 아부하며, 눈치보고 찬양하며 역사를 팔아먹었다.
눈 딱 감고 ‘이게 우리 역사야’ 하면서
중국이 가르쳐준대로, 일본이 써준 거짓말대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쳐왔다.
있지도 않은 한사군, ‘낙랑 진번 임둔 현도’를 달달 외우게 했고,
뼈 속까지 중국인이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유일한 정사라고 가르쳤다.
‘우리 한민족은 다른 나라를 한번도 침략하지 않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니,
일제에 대항하지 말고 조용히 입 닥치고 있으라고 배웠다.
항일 투쟁의 독립운동사는 아직도 어둠 속에 갇혀있다.
우리 역사의 혼은 가슴깊이 피멍 들고 거친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만주를 떠돌아 우리 역사의 깊은 슬픔에 눈 뜨고,
1백년전 환단고기 초간본을 편찬한 독립운동가 운초 계연수 선생은 1920년 일본 밀정에 의해 팔다리가 잘려진 채 압록강에 버려졌다.
그리고 그 계연수 선생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어린 소년 이유립은 해방된 이후 평생을 골방에 틀어박혀서, 라면 하나 꽁꽁 얼려서 씹어 먹으며 고등학생 제자와 무릎 끓고 마주 앉아 환단고기 원본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짚어가며 ‘이게 진짜 우리 역사다’라고 가르쳤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죽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왜곡된 역사 앞에 침묵할 수 없습니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온 지난 30여년 동안 환단고기 원문을
한글로 풀어내면서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중국,일본,이집트,중동,유럽,북남미 등 지구촌 각지의 역사 현장을 답사하고
2012년 6월 서울국제도서전을 통해 환단고기 완역본을 발간하였습니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인류 원형문화와 뿌리 역사를 총체적으로 알리기 위해
관련 사진과 사료를 담다보니 해제가 600쪽, 번역문과 미주가 800쪽 합하여 14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한민족 역사와 문화를 회복해야합니다.
환단고기에는 동북아 역사전쟁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고대사의 진실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는 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되찾고 동북아의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인류의 상고 역사, 그 중에서도 고대 동북아 역사의 실체를 밝혀주는 고귀한 역사 경전입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한민족의 뿌리 역사 뿐 아니라 인류역사의 잊혀진 원형문화까지 시원스레 들여다 볼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한마디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완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가, 지인들로부터 구한 한민족의 정통사서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입니다. 안함로의『삼성기 상』, 원동중의『삼성기 하』, 행촌이암의『단군세기』, 복애거사 범장의『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로 구성되어있고, 해학 이기의 지도 아래 계연수가 발간한 역사서의 결정판이 『환단고기』입니다. 이후 이유립 선생이 48년 환단고기를 가지고 월남하여 남한에서 널리 대중화 시켰습니다.
*환단고기의 편찬과 대중화의 과정 http://www.jsd.or.kr/hwan/intro.php?mid=46
환단고기는 강단사학계에서 고대사 대표적 사서로 꼽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발견할 수 없는 한민족 역사와 문화 참모습을 보여주는 신교문화의 정통사서입니다. 인류의 창세문명과 한민족의 뿌리역사 진실을 밝혀주며, 한민족사의 국통맥을 최초로 명확하게 바로 잡아줍니다. 한민족의 고유 신앙이요 인류의 시원종교인 신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신교를 바탕으로 사람이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지 철학적으로 밝혀주기도 합니다. 또한 동방 한민족이 천자문화의 주인공이며 책력문화의 시조로서 수를 최초로 밝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조선사의 비밀을 푸는 핵심열쇠인 ‘삼한관경제’에 대해 나타나고 있으며, 배달과 고조선이 창제한 문제를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문자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줍니다. 또한 상고시절 한민족의 대외관계가 드러나 중국과 일본 몽고, 흉노의 왕조 개척사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위서?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는 대체로『환단고기』를 위서라하며 정식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배경은 일제의 한민족 상고사 말살 이후, 친일청산이 되지 않아 식민사학이 그대로 답습된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시대적인 필요에 의해 조작된 위서로 매도합니다. 위서론자들은 역사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로 진실을 왜곡합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보면 수백, 수천 년이라는 세월 속에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다섯 권의 사서가 천년에 걸쳐 쓰인 사실과 그 중 가장 나중에 쓰인 「태백일사」나오고서 400년이 지나 『환단고기』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습니다.
원래 다섯 저자들이 쓴 원본이 무수한 전란과 외세의 사서 강탈을 무사히 피하여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계연수가 모은 다섯 권은 필사본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다는 지엽적인 부분으로, 국통맥과 태곳적 한문화의 다양한 모습 등을 밝혀주는『환단고기』의 사료 가치가 전적으로 매도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서론자들이 근대어라고 주장하는 국가, 문화, 평등, 자유, 인류 등의 어휘는 이미 고대부터 써오던 술어입니다. 예전부터 써오던 고유술어를 현대적, 기독교적 술어로 혼동하는 것은 우리 상고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신교 삼신문화의 역사관’으로 한민족과 인류 태고 역사를 기록하였음에도, 이 땅의 학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환단고기』의 비운은 뿌리 문화가 말살된 한민족의 참담한 역사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서 논쟁이 한창 들끓고 있을 때, 『환단고기』의 진실성을 확인해 주는 연구가 천문분야에서 있었습니다. 1993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고조선 13대 흘달단군 때 일어난 다섯 행성 결집현상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해 낸 것이다. 현대 과학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증명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서론자들은 누군가가 기록자체를 조작해서 서술한 것이라며 여전히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1983년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이 발견됨으로서 『환단고기』에서만 증명될 수 있는 ‘배달’의 고고학적 발견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2000년 이후로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논문이 하나도 발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서지학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진서’라고 얘기하는 논문이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전통사서인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위서라고 부정하는 것은, 기존 사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한국사의 진실을 묻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위서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도 책을 정확히 읽어보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이나 인터넷에 올려진 글들만 무조건으로 수용해 위서론을 펴고 있습니다. 일단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환단고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환단고기를 믿고 안믿고의 문제를 떠나서 환단고기를 얼마만큼 읽어보았는가. 또한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서에서 볼 수 없는 너무도 놀랍고 위대한 사실들이 담겨있는 환단고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것은 읽는 사람들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환단고기를 먼저 있는 그대로 한번 보세요. 색안경을 쓰고 너무 비판적으로 봐도 안 되고 그렇다고 맹신하면서 봐도 안돼요. 일단은 있는 그대로 보시면서 글을 쓴 저자와 한 마음이 되어서 원 뜻을 온 몸으로 느껴봐야 해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서로 무슨 의도로 글을 썼는지 깨어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때 스스로 책을 보는 입장이 정리되리라 봅니다.
30년만의 완역본?
완역본이란 완전하게 번역했다는 뜻입니다. 환단고기의 번역본은 여러가지 책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한자전문을 번역하고 한자와 지명 하나하나에 대한 고찰과 각주와 보충설명 그리고 환단고기의 역사를 설명하는 해제(해제만 500페이지입니다)까지 있는 책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동안의 환단고기의 오역을 정정하고 한자풀이,화보와 사진, 그리고 설명 등을 통하여 충분히 환단고기의 모든 내용을 그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이번에 나왔습니다. (다음주 8월 20일 즈음 서점출간)
역사의 왜곡
현재 우리 학계는 크게 두 사관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후기노론사관이고 또 하나는 일제식민사관인데 이 두 가지 사관은 별개가 아니고 한 사관입니다. 노론사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노론이라는 당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당파가 서인인데, 이 서인의 핵심이 노론입니다. 노론의 사관는 우리들의 임금은 조선국왕이 아닌 명나라 황제이기 때문에,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함으로써 임금을 배신했다. 배신한 불충을 저질렀으니까 우리가 광해군을 내쫓는 것은 충성이다. 이런 논리로 인조반정이란 쿠테타를 합리화하죠. 이들은 자국의 국왕을 부정하고, 명나라의 황제를 임금으로 여기는 뿌리부터 잘못된 사관을 가지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무너지면 자신들이 집권하는 모든 정당성이 해체가 된단 말입니다. 결국 노론 한 당파의 시각으로 조선후기사를 서술해온 그런 점들을 노론사관이라 지칭을 한 것입니다.
1910년도에 조선이 망하고 76명의 조선인이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데, 당파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 64명 중 56명이 노론소속입니다.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당이었던 노론이란 당파가 조직적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라는 겁니다. 이들은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고, 일본인들로부터 배웠던 일제식민사관을 해방 이후에도 계속 한국사의 주류로 만든 것이죠.
조선사편수회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하고 한국사의 공간을 축소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축소는 한국사의 시작을 삼국사기 초기기록불신론으로 따지면 5천년이 아닌, 약 1,500~1,600년밖에 안되죠. 또 하나는 한국사를 반도 내에 가둬두는 공간의 축소화로 나타나는데, 만선사관이라고 해서 한반도 독자적으로는 역사가 발전할 수 없고 만주에 구속되어서 발전한다는 이야기이죠.
해방 이후에도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의 역사관이 한국인들 사학계에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우리가 해방된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킨다면 당연히 연암 박지원, 성호 이익,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성재 이시영 이쪽 분들로 이어지는, 식민사관이 아닌 역사관을 가르쳐야 하는 건 너무나 상식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 상식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자체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한 학계에선 현대사는 너무 가깝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렵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독립운동사 연구가 금기시 되었습니다. 1980년대 독립운동사와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붐이 일어나면서 실질적으로 현대사 연구를 금지시킨 원칙 아닌 원칙은 깨집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분들이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1차 사료가 대단히 부족하고, 거의 일제시대의 자료에 의존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보니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병도의 스승 쓰다소우키치는 한반도의 북부에는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가 있었고,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사는 위로는 중국식민지, 아래로는 일본식민지로 출발한 역사이기 때문에 지금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의 당연한 귀결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김부식이 창작한 거짓말로 몰게 됩니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관을 일란성 쌍둥이로,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은 한반도 북부(현재의 북한영토)는 중국의 역사영토였다고 하는 것인데, 일제 식민사관과 내용이 똑같은 겁니다. 왜 논리가 같을 수밖에 없냐면 침략사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다보니까 국민들이 보기에는 마치 우리도 동북공정에 맞서서 싸우는 것 같지만 내심으로는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에서 나타나듯이 동북공정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중국은 현재 우하량 유적 한가운데를 뚫고 4차선 도로를 놓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우하량 유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가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인데 중국은 이 유적이 사라지길 바라는 겁니다. 중국 동북공정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말해주는 유적 유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쪽을 빨리 연구해서 우리민족의 시원은 어딘가라는 부분까지도 홍산문화가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인데,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는 홍산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생뚱맞다라고 할 정도로 거의 연구가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나
현재 중고등학교의 역사교육은 현 학계를 바탕으로 합니다. 하지만 현재 강단사학에서는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합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 독립운동을 하던 대부분 의식 있는 사람들은 정식적인 제도권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제에 편승한 친일파는 제도권안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2년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국은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한국인 정치가를 물색했고, 그 적임자는 이승만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던 김구 선생이나, 여운형 선생 등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로 미국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이승만은 친미주의자로, 미국에 살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지지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게 됩니다.
해방직후 친일파 숙청의 건의가 거세게 들어오고 반민족 행위자 특별처벌법을 만들어 반민특위를 만들었지만, 이승만 대통령 직권으로 테러를 하며 1년 만에 유야무야 없던 일로 해버립니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의 경우 4년간 나치에 협력한 반민족자 100만 명을 체포하여 1만 명의 넘는 사람을 즉결 처형합니다. 민족반역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단한명의 친일파도 처형당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독립운동에 대한 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습니다.
친일파가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하며 친미파가 되었고, 그들은 반공을 외치며 민족주의자들을 빨갱이로 몰았습니다. 때문에 어떤 사학자는‘우리나라는 친일청산이 된 것이 아니라, 친일파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이 청산 당했다’라고 합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변변한 직업도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이미 기득권을 차지한 친일파에 눌려 공로가 인정되지 않아 표창을 받지 못했고, 때문에 나라에서 지원하는 연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진정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중 대다수는 현재도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무국적자로 국적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사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일제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하기 위해 설치한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마니시 류의 수사관보로 일을 했던 친일파 역사학자 이병도 역시 중요한 자리에 등용이 됩니다. 서울대 사학과 초대교수가 되고 60년도에는 문교부장관까지 합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학자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자,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시켜 한국 역사학계를 독차지합니다. 그러한 이병도도 죽기 직전인 1989년에는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조상이라고 기고를 하게 됩니다. 환단고기는 잃어버린 조선 고대 역사를 밝히는 몇 안되는 소중한 책입니다. 하지만 일제 식민사관의 역사의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내용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우리 상고사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 전혀 없나
물론 우리 상고사에 대해 말하는 책이 환단고기 뿐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자주적 역사서는 수천 년 동안의 무수한 전란 속에서 화재로 소실되거나 외적에게 탈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때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유가와 불가 사상에 벗어난 사서들이 대거 소각되었습니다. 특히 고려 중기 김부식의 대대적인 사료 수거와 소각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민족사의 허리가 잘려나간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사서 소멸은 중앙 조정에 의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백 년 전, 조선 초기만 해도『삼성기』를 비롯한 10여 종에 달하는 한민족의 도가사서들이 민간에 널리 실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 때에 와서 성리학 중심의 통치이념과 사관을 구축하기 위해 유교문화에 부합되지 않는 전통사서와 도서들을 조정에서 모조리 수거합니다. 명나라를 황제로 모셔온 조선 사대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 고유 사서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불온서적이었죠. 우리나라가 천자의 나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고유사서들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단지 책 이름과 저자 이름만이 기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화 사대주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삼성기, 단군세기, 태백일사와 같은 내용들의 책은 조선시대 때 소장하고 있으면 참수를 당하는 책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예종, 성종, 세 차례에 걸쳐 고조선비기,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삼성기 등을 강제 수거한 내용이 나옵니다. 국왕 3대에 걸쳐 지속성을 가지고 행했던 원칙적이고 장기적인 국가 정책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시대의 어떤 학자도 이러한 사서를 인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태백일사를 저술한 이맥 이후 고성이씨 가문은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이맥의 손자 이방(李滂)은 1545년(인종 원년) 평안도 삭주도호부사로 삭주로 옮겨간 후 삭주에 정착하게 된다. 고성이씨 가문은 이방의 삭주도호부사 발령을 좌천성 인사로 보고 있다. 이후 인조대 ‘이괄의 난’은 고성이씨집안의 활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당연히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한 역사 사료는 조선시대 때 자료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서수거령 이후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우리 사서가 탈취, 소실되었습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제가 행한 조선사 말살작전으로 총 51종 20여만 권의 서적이 소각 또는 인멸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주적인 역사서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환단고기』는 특히 더 가치가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
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역사를 왜 알아야하나
일제강점기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장담하건데, 한국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한국인에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으며 찬영했지만, 현재 한국은 결국은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아베 노부유키도 찬란한 조선의 문화를 인정했건만, 우리 스스로는 참된 역사를 잃어버려 아직도 자신들의 문화를 폄하하며 홍산문화와 같은 유물이 발견 되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일제 사실 역사학계는 역사학계일 뿐이에요. 역사가 먼저 있고 그걸 서술하는 역사학이 있는 거지, 역사학 위에 역사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일제강점기 때 살던 사람에겐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역사만이 역사학이었지, 다른 역사는 발도 못 붙였잖아요? 그것처럼 환단고기도 지금의 역사학계에선 이해를 못하는 책이에요. 쉽게 말해서 지금 역사학계는 2차원인데, 환단고기는 3차원이에요. 왜냐, 지금 역사학계는 유물이 나와야 믿어요. 보여줘야 믿어요. 근데 환단고기는 그걸 뛰어넘어서 우리 한민족의 정신, 철학, 사상을 보여주거든요. 수준 높은 역사를 배우고 역사에 봉사하는 큰 인물로 태어나려면 환단고기를 읽어보아야 합니다.
* 한민족의 잃어버린 문화와 역사를 되찾는 환단고기 북 콘서트에 참여를 원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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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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